터키

터키-돌마바흐체 궁전, 성소피아 성당, 블루모스크 사원, 히포드럼

Parkyoungki-Paolo 2007. 5. 2. 13:31
 

터키-돌마바흐체 궁전, 성소피아 성당, 블루모스크 사원


4월24일 오늘은 이번 터키여행을 마감하는 날이다.

낯선 곳에서 낯선 이들과의 시간이 익숙해져갈 무렵 본격적인 이스탄불 관광에 나섰다.


먼저 찾은 곳은 돌마바흐체 궁전이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1842~1853년 사이에 술탄 압둘마지드에 의해 건축된 근대 궁전으로서

베르사유궁전을 모델로 하여 바로크와 로코코양식을 혼합 건축하였다하고 가득찬정원이란

뜻을 담고 있다하며 총285개의 방과 43개의 홀과 6개의 터키식 목욕탕이 있다한다.

우리는 그 중 일부를 보았다.


매립지에 건립된 이 아름다운 궁전은 바다를 접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는 생각이다. 

베르사유 궁전에는 어마어마한 숲의 정원이 있다면 이곳은 바다가 정원이다.

보스프러스 해협이 정원인 것이다.

맑고 푸르며 햇살 가득한 바닷가 궁전 내부는 실용적으로 지어져 있었고. 베르사유나

쉔부른에 비하여 화려함은 뒤지지만 공간은 필요한 만큼 넉넉하였으며 황제의 침실은 매우

검소하였고 비교적 근대궁전인 만큼 효과적으로 목재를 많이 사용한 궁전이었다.

궁전 곳곳에는 실제 사용하였던 세계 각국으로부터 유입된 장식물이 함께 전시되어 있어

옛 오스만제국의 영화를 엿볼 수 있었다.

 

18일 보스프러스 크루즈 선상에서 바라본 흐린 날의 돌마바흐체 궁전 모습. 

 

프랑스식 돌마바흐체 정원은 깔끔히 단장 되어있었다. 

 

돌마바흐체 궁전 정문 앞. 

 

양편 가이드 라인을 2회 넘으면 바로 퇴장이라는 엄격한 규정을 두어 보호할 것을 보호하고 있었다. 

 

이슬람 국가의 궁전임을 알아차렸을 뿐 어떤 내용의 글인 줄은 여적 모르겠다. 아마도 알라신을 찬양

하는 내용일 것으로 짐작된다.

 

황제의 접견실은 ㄷ 자 형태의 구조로서 3면에서 빛이 들어와 밝았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자태의 도자기인가? 볼수록 진귀함이 느껴진다.

 

 실제 황실에서 사용했던 이슬람식 차 셋트와 포크 그리고 나이프.

 

당시 청나라 황제가 궁전 완공 축하용으로 보내온 선물이라 하니 오스만제국의 교역 범위를 말해준다.

 

이집트에서 보내진 어마어마한 크기의 상아로 제작된 스텐드. 

 

조각된 이동식 난로가 눈에 띄었다.  

 

천정이 마치 돔인 듯 보이지만 평면으로서 입체적 화법으로 그린 아름다운 유화그림이다.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상드리에로 헌금에 의해서만 불이 켜진다하며 빌게이츠가 왔을 때 불을 켜

찬란한아름다움을 보여줬지만 제공된 헌금액은 공개되지 않았다 한다. 

 

보스프러스 해협과 경계를 이루는 펜스도 예술적 감각을 충분히 발휘하여 세워 놓아져 있다. 

 

예쁜 문을 통하여 바다로 나가 바로 배에 오를 수 있도록 접안 시설이 갖춰져 있다. 

 

 


점심 식사 후 성소피아 성당을 찾았다.

비잔틴시대 최고의 이 걸작품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22년에 하기아 소피아에게 바친

구당의 수난 후 537년 유스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새로운 구상으로 재건된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이 멋쟁이 황제는 헌당식에 참석하여 얼마나 감격하였던지 오! 솔로몬이여! 나 그대에게

이겼노라고 부르짖었다한다.

 

하지만 6세기에 장식된, 그 찬란한 아름다움을 뽐냈을 모자이크는 8~9세기 걸친 성당파괴운동

때에 완전히 파괴되고 그 후에 다시 제작된 모자이크는 또다시 투르크 점령하에 대부분 회손

되었으나 근년에 9~13세기의 모자이크가 부분적이나마 남아 발견되어 우리가 비잔틴시대의

세련된 장식문화를 오늘날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 1202년 4차 십자군은 성당

내에 장식된 수많은 보석과 콘스탄티노플의 재물을 약탈해 가는 횡포를 부렸으며 이때 약탈한

많은 보석들은 대부분 베네치아 성마르코 성당에 있다.

 

이처럼 아름답고 장엄한 예술품 성소피아 성당이 이슬람국통치하에서도 현재까지 존재하여

왔고 박물관형식으로 개방될망정 그나마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은 이슬람의 너그러운 포용성

으로 보아야 할 것이고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터키인들은 이곳을 아야소피아라 부르며 존속

시켜야할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18일 버스 안에서 창문을 통하여 촬영한 성소피아 성당 외관. 

 

오늘은 이처럼 맑고 투명한 구름 한 점 없는 눈부신 날이었다. 

 

 아름다운 성당내 스테인 글라스 창문.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미사대가 놓여져 있어야 하는 것을... 누구를 탓하겠는가.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는 아기예수와 성모님! 무슬림일 망정 죄의 댓가가 두려워 성스러움을 감히

훼손하려 아무도 덤비지 않아 이처럼  남겨진 것은 아닐까!

 

 

 마찬가지로 남겨졌을 것 같은 아주 다행스런 그리스토의 모습과 두 분.

 

모두가 이런 상태 정도로 유지하였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좌편 불켜진 쪽이 네이브로 일부는 수리중에 있었다. 

 

천국과 지옥의 문, 나와 당신에게는 어떤 문이 열려 줄 것인가? 

 

2층 한켠에 이와 같은 성화를 따로 진열하여 이곳을 박물관으로 개방할 뿐이라고 무슬림 스스로를

위로 하려는 명분의 장으로 이해되었다. 

 

불자가 이곳에 오신들 왜 안 어울리시겠는가? 

 

성소피아 성당과 블루모스크 사원 사이에는 문화교류와 화합의 장을 위한 공원이 잘 조성되어 있다. 

 

무슬림도 성소피아 성당을 찾아 관람하고 경의를 보였다. 

 

 


블르모스크에도 다녀왔다.

성소피아 성당 맞은편으로 걸어서 10분 거리에 블루모스크가 있었다.

이곳은 지금도 사원으로 사용되는 이슬람인 들의  자랑이며 성스러운 곳이다. 나는 최소한

이슬람인들이 기독교인들에 비하여 너그럽다는 인상을 이곳에서도 받았다. 성 소피아를 모방

발전시키려 애쓴 건축형태에서 타 종교를 배려하고 인정하며 발전해 가려는, 신이 사랑할 현명한 정신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실 유대교, 천주교, 개신교, 이슬람은 모두가 같은 신 하느님을 믿고 있으며 믿는 방법만을 달리하고 있는데 정치적 목적을 종교전쟁으로 위장하는 위선은 문화인들에겐 어울리지 않는 야만이 아닐까? 사원 내부는 경건하고 성스러웠으며 익히 알려진 대로 블루타일로 모자이크된 아름다움이 시대의 흐름에도 찬란히 빛나고 있었고 1616년 슐탄 아흐멧시대에 건축되었음에도 고풍스럽기보다는 현대적인 아름다움을 나는 느꼈다.

 

18일에 차량안에서 촬영한 블루모스크 사원 외관. 

 

성소피아 성당과 블루모스크 사원 딱 중간정도 위치에서 성소피아 성당을 바라보았다. 

 

블루모스크 사원 첨탑에는 햇살이 부딪쳐 찬란했다. 

 

왜 블루모스크라고 유럽인들이 호칭한 이유는 금새 이해됐다.

푸른 빛과 색은 사람에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아릅답고 경건한 내부는 내 감각으로 볼 때 극히 현대적인 아름다움도 간직하고 있었다. 동서양문화가 합하여 발생시킨 문화발전의 극치점으로 나는 느꼈다.

  

기둥에도 아름다운 블루로 아름답게 모자이크 되어 있고 창문이 수 없이 많으며 극히 아름다운 스테인

글라스 창으로 빛이 들어오는 쪽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가 신비였다. 

 

 경건한 곳에서 후레쉬를 사용치않고 아내를 함께 담아 보았다.

 

 블루모스크 사원의 소담스런 정문으로 바로 앞이 히포드럼 광장이었다. 


히포드럼 광장

블루모스크 정문은 낮고 좁았다. 바로 정문 앞이 히포드럼 광장으로 비잔틴시대에는 전차 경기장으로 쓰였던 곳이다. 이곳에는 경이로운 이집트의 오벨리스크가 있었고,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 아폴로 신전에서 가져온 세 마리 뱀 장식을 넣어 청동으로 만든 세펜타인 기둥이 중앙에 있었으며 건너에는 콘스탄티누스 7세가 황동과 청동으로 만들어 세운 오벨리스크가 있었는데 모습이 흉악하여 3,500년 전의 것인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보다 무척 오래된 것으로 보였으나 사실은 십자군이 청동과 황동을 떼어감으로서 남겨진 상처 난 흉한 모습이라 한다. 

 

운반 중 세 토막나 그 중 윗부분만 설치한 것이라 하는데 본래의 높이는 60m이었고 무게는 800톤으로

추정되며 현재의 모양은 그 중 윗부분으로 꼭대기는 피라밋 모양이다. 오벨리스크는 고대이집트왕조

때 태양신앙의 상징으로 세워진 하나의 큰 돌로서만 만들어지는 기념비라하는데 로제타석 발견

전이라 상형문자도 해독이 안되어 뜻도 몰랐을 텐데도 멋스러움과 힘의 과시로 이처럼 망가져 영국과

프랑스와 터키에 와 있는 인류 문화제 훼손 현상이 매우 안타까웠다.   

 

내 모습 바로 뒤로 보이는 꽈배기모양으로 세원진 것이 그리스에서 콘스탄니누스 대제가 가져왔다는

세펜타인 기둥으로 뱀 세마리 장식으로 유명하다. 조금 멀리 보이는 오벨리스크는 코스탄티누스 7세가

황동과 청동을 씌워 만들어 세운것을 십자군들이 철을 벗겨감으로서 흉한모습으로 남아 십자군의 약탈상을 증명하고 있다.

 

히포드롬 공원에 소풍나온 둣한 희잡쓴 아낙과 함께 사진에 담으려했으나 얼굴을 가리고 있다. 

 

그런데 요 녀석이 내게 달려와 함께 사진찍자하여 나는 크게 기뻤고,  

 

다시 달려가 동생과 친구들을 잔뜩 불러 모으더니 요렇게 천진난만한 모습을 연출해 주었다.

나의 이런 광경에 함께한 일행 여러분이 천사와 같은 아이들과 함께하는 자신들에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아내도 형제의 나라 천사들과 함께... 

 

공원 인근의 것으로 이처럼 대규모의 물 저장시설이 이스탄불내에는 수 없이 많다.

 

 

지금 다시 생각하니 터키에서의 아쉬운 점도 많다.

좀더 여유 있게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있다면 “이상한 매력이 있는 나라 터키”저작자가

찾아보라 권유했던 샤프란과 나비계곡을 이스탄불과 함께 꼭 가보려 한다.

다시 갈 기회가 오기는 힘들 테지만...


여행이란 돌아올 곳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이라 했던가?

나는 집에 돌아와 마음과 몸이 편안했다.


끝으로 함께 했던 좋으신 일행 분들과 최지원, 김하나, 귤페라, 베르캇을 한 사람 ...한 사람...

터키를 향한 하늘에 미소 띤 얼굴 그려 올리며 오래오래 기억하겠다는 우리에 마음 보낸다.


-자유인-


* 에필로그

 

하나; 

나는 운동을 좋아한다. 거의 중독상태다. 운동으로 얻은 것이 많기에 멈출 수는 없다.

이번 여행에서는 운동 중독증에 의한 부작용을 겪었다.

운동을 하지않으니 피로치가 않고 피로치 않으니 쉽게 잠들지 못했다. 술에 의존하거나 늦게

잠들어 수면량이 부족하여 다음 날 커디션이 안 좋은 상태의 반복이었다.

다음 여행에서는 컨디션을 좋게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준비해 떠나야 하겠다.

  

둘;

이번 여행 떠나기전 버스로의 이동시간이 많아 차내서 분명 노래 부르게 될 줄 알았다.

그래서 가요 네 곡과 팝송 한 곡의 가사를 준비하였고 노래 연습도 했었다. 

그러나 한 소절도 부를 기회는 없었다. 아마도 수녀님 두 분이 함께하셨기에 자중하느라 그랬을 것이다. 나는 준비한 것을 그대로 비치할 것이고 자중해 주신 분들께 고맙게 생각한다.

 

셋; 

터키는 이슬람 국가다. 그래서 사회규율이 매우 엄격하고 폐쇄적일 것으로 나는 선입견을 갖고

갔다. 그러나 이스탄불 도착 첫날 밤, 무심코 테레비젼 체널 돌리다가 아마 2번으로 기억하는데!

아메리칸 스타일의 포르노가 방영되고 있었다. 우리는 깜짝놀라 당황했지만 솔직히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