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자령 산행기
2007년 1월 26일 토요일
대관령-새봉-선자령-낮은목-곤신봉-낮은목-보현사
지난 12일 능경봉산행을 그렇게 즐겁게 마치고도 멋진 설산을 뒤로할 때는
더욱 두껍게 피어나는 설경을 두고 간다는 아쉬움이 무척이나 많았었다.
그 후로도 영동지방에는 줄기차게 눈이 내린다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그리움은
가슴마다 설산에 있었다.
오늘은 능경봉 들머리와 반대되는 북쪽 들머리로 올라 산행이 시작되었다.
어제까지는 한파 주의보가 발령 중이었고 최저기온이 영하 25도를 하회하였으며
오늘의 대관령 최저 기온도 영하 20도 일 것이라며 어제 본 기상뉴스는 추위가
쉽게 물러가지는 않을 듯 하다라고 예보되었었다.
백두대간에 위치한 선자령은 바람이 세고도 많기로 잘 알려진 곳으로서 풍력
발전기가 국내 최다로 설치된 곳이 아니던가.
그래서 나는 북풍한설과 엄동에 맞서 이겨낼 준비를 단단히 하고자 온갖 겨울장비를
모두 챙겨서 배낭을 꾸리고 버거운 등짐을 졌건만 구즈다운자켓은 공연한 짐만 되었다.
차에 내려서 맞이한 대관령 공기는 딱히 기분 좋을 정도로 차가웠다.
맑고 푸르른 햇살만이 반짝반짝 튕겨 나올 뿐 그 유명한 바람은 잠잠하였고 광활한
설경을 카메라에 담으며 일열 종대로 시나브로 올라온 선자령까지는 반팔셔츠
차림만으로 올라야 상쾌함을 잃지 않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봉우리에 서니 날이 맑아 많은 볼 것들이 멀리 있는 것마저 내 눈동자에 맺혀졌다.
강릉시내와 동해바다가 발치로 드넓게 펼쳐졌으며 희고 검은 수목화 또한 아름아름
드리워져있었고 걸어온 길을 뒤 돌아보니 형형색색의 많은 등산객들이 순백의 산등성을
곱게 물들이며 능선을 걷는 모습은 보무도 당당하여 보기 좋았다.
올라선 댓가를 얻으려 사위를 보니 웅대한 경치에 기분이 좋아지는데 문득 춥다는
생각이 들었다. 덧옷을 입고 행동식으로 요기를 하다가 풍경을 담고선 오늘에 내 개인
목적지 곤신봉으로 발걸음 재촉하려 하는데 말 걸어오는 젊은이가 있다.
보현사 가는 길이 이 길이 맞습니까?
같은 산악회 사람인 것을 확인하고 함께 곤신봉을 다녀오기로 의기투합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많은 부분에 있어 나와 정서가 비슷한 젊은 후배를 만났다는
것이 이번 산행에서의 커다란 기쁨이기도 하였다.
선자령을 지나서는 산행객도 없어 그야말로 경쾌하고 상쾌하게 장쾌한 설원을 걷는데
뒤에서는 연속으로 아~좋다. 라는 환희에 가득 찬 신음이 가늘게 들려온다.
이런 설경을 처음으로 대한다는 최성환 씨의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의 탄식인 것이다.
눈이 이처럼 깊이 쌓여있음에도 간혹은 된비알 흙길을 걷기도 하였는데 아마도
바람이 너무나 강하여 능선 아래로 내려진 눈을 이내 밀어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되었다. 한동안 발자욱 뜸한 눈길을 걸었고 어느 곳은 눈이 얼어서 발이 빠지지
않고 또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가슴까지 빠져 헤어 나오기조차 힘겨움을 반복하다가
설봉 곤신봉에 올랐는데 마치 안나푸르나에라도 오른 듯한 그런 망상의 환희를
우리는 맛보았다. 오르는 중 고개 들어 봉우리를 바라보면 온통 새하얄 뿐 발자국
흔적 없는 설봉 뒤로는 파아란 하늘만이 배경이 되어주었기에 우리는 더욱 망상에
빠져들었던 것이었다. 원의 중심에 선 듯 둥글게 보이는 풍경에 심취하여 우리는
우리들 만에 첫 발자욱을 좀 더 멀리까지 만들어 가다가 머물고, 기념사진을 남기니
혼미했던 정신이 제자리를 찾아 시계를 보게 한다. 이제는 내려서야할 시간!
가야할 길을 바라보며 하얀 설봉을 등으로 지고 내려오는데 뒤에서 아저씨!
하는 비명소리가 나는 게 아닌가? 얼른 돌아보니 스틱만이 허공을 맴돌고 최성환 씨가
깊은 눈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한참만에야 겨우 빠져나왔다.
안부에 내려선 순간 불현듯 어둠이 깔린다 싶더니 맑았던 하늘엔 구름이 짙게 드리워져
가고 능선위로는 검은 높바람이 일어났으며 마침내 돌지않던 풍차...
풍력발전기의 커다란 날개가 서서히 끼익~끼익 불쾌한 비명을 지르며 돌아가기
시작하였을 때 우리는 보현사로 하산하기위하여 낮은 목으로 내려와 하강하기
시작하였는데 그야말로 내리쏟듯 가파른 길이 약300m는 족히 연속되었다.
마치 봅슬레이 경기장 같이 깊게 홈파진 U자형 터널길이 지그재그로 나있어 앞서간
선구자들이 미끄러지며 만들어낸 길이었다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기에 나도 길
닦으며 미끄러지는 모처럼 만에 얻어진 동심의 즐거움을 사양치 않았다.
이윽고 급경사가 끝난 후 이어지는 계곡길을 걷다가 생각하면 두려웠던.......
머리까지 잠기는 깊은 눈에 빠졌을 때는 히말라야 크래바스라도 경험한 듯 한 것이
오히려 재밌었다. 이처럼 눈에 온몸을 담그고 몇 번은 미끄러지고 나서야 보현사에는
약속된 14시 30분에 안착하였고 아마도 일생 중 가장 많이 엉덩방아 찐 날이
아니었나 싶다.
한편으로 이토록 깊은 눈길에서는 스틱은 오히려 방해가 되고 아이젠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체험하였고 이런 조건에서 가장 필요한 장비는
스패치와 방수 장갑이었다. 이 두 가지가 준비 안 되었다면 틀림없이 심한 동상을
입었을 것이고 스틱보다는 엉덩이 보호대가 오히려 필요했던 산행이었다.
올겨울 들어 쌓여진 대관령 일대의 눈 깊이가 어림잡아 100cm는 넘어선다.
주민들도 10년 만에 내린 대설이라 하였고 내가 산행에 나선지 6년이나 처음으로
맞이하는 눈이 풍부한 이번겨울의 정취를 조금은 무리해서라도 충분히 즐겨야 다음
겨울이 와도 후회되지 않겠나 싶다. 칼날 같은 첨봉도 하늘을 찌를 듯한 침봉도 없는
산행지 선자령에서 즐겼던 깊고도 드넓은 설원 산행의 장쾌한 추억은 완벽한
영상으로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을 것이다.
-자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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